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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정 · 이세정 개인전

참여작가 : 최윤정, 이세정
전시 기간 : 2013년 7월 6일 ~ 2013년 7월 21일 (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 쉐마미술관



평론

자유로운 필치와 역동적 기운에서

작가 이세정의 작업에 대한 기억은 힘과 맑음이었다. 어언 10년을 넘긴 인연임에도 진지하게 작업을 알아가는 데는 오히려 많은 시간이 걸린듯하다. 작가는 ‘일품화’라는 자유로운 정신력의 구사에 관심을 갖고 꾸준하게 작업해 왔다. 그러한 정신력의 집약된 표현은 자연의 생성과 변화의 기운과도 같이 순간순간 에너지를 조절하는 것에도 능숙해야만 한다. 때로는 폭풍처럼 세차게, 때로는 맑게 갠 하늘처럼 고요하게 전체 화폭의 면과 부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역동적 실체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인화적 풍취의 작업에서나 일필휘지의 강세로 표현된 세계에서나 흉중의 심상을 표출하고자 했을 것이다. 마음을 그린다는 것은 가능한가. 작가는 내면을 들추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품의 정신력과 지필묵이 일체되는 물아일체의 순간들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지지체가 천이든 종이든 동양화의 붓은 순간적 제스처에 의존하므로 상당한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일품의 자유로움은 그와 같은 공력으로 다져진 다음 도달하게 된다.

2010. 7 구기의 선선 (박지숙, 이세정 2인전)서문 중 중에서
박남희 (미술평론)


최윤정공존하는 안과 밖의 이미지

최윤정의 화면은 이중의 막을 형성하고 있다. 우선 재질이 다른 종이와 비단이 겹쳐져서 두 개의 화면을 만들었다. 각각의 화면에는 정교하게, 채색으로 꽃이 그려져 있다. 주변 배경이나 특정한 상황성은 배제된 채로 오로지 단독으로 꽃/양난의 한 부분이 피어나듯 묘사되어 있다. 단일하고 납작한 하나의 평면이 아니라 성질이 다른 두 개의 화면이 깊이를 달리하면서 차오르는 형국이다. 그것은 보여주는 동시에 은연 중 지우고 또렷해졌다 희미해지는 것을 동시에 수반한다. 시간의 차이는 두 화면을 보는 것, 인식하는 것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또한 동일한 소재가 약간의 차이를 지니고 그려진 두 개의 화면 역시 시차에 의해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오버랩 되는 상황을 연출한다. 안에 그려진 꽃과 그 위에 그려진 꽃은 같으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안쪽에 그려진 것이 과거의 이미지라면 표면에 올라온 이미지는 현재의 것일 수도 있다. 내부의 것이 감추어지고 미처 드러나지 않는 내면/심층의 기억이라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그것이 부득이 외화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난 시간의 기억, 내밀한 경험과 상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불현듯 출몰해 심층에서 지층으로 솟아 올라오기를 거듭한다. 기억은 은밀한 달콤함과 고통스러운 자괴감을 한 몸으로 거느리고 잠복해 있으면서 우리 몸 어딘가에 고여 있다가 자라나고 순간적으로 발아한다. 밀고 올라온다. 작가는 자신만의 기억, 지난 시간의 추억이나 내면의 갈망 등을 안쪽 화면에 꽃의 형상을 빌어 안치시켰다. 그것은 자신에 의해 가라앉혀진 것들이다. 동시에 그것은 마냥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수면위로 떠오르듯 다시 새로운 화면, 또 다른 앞의 화면을 통해 환생한다. 이때 표면은 내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동시에 떠오른다. 여기서 그림자란 여전히 존재에 어른거리는, 존재의 배면인 추억/ 기억인 셈이다. 이중의 화면 연출은 그러한 내용을 시각화화는 방법론에 따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최윤정은 작은 사각형의 화면을 무수히 반복해서 격자꼴로 연출한다. 역시 그 작은 화면도 이중의 표면을 지니면서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꽃의 일부분이 조각조각 분리되고 파편처럼 떠돌면서 보여진다. 동일할 수 없는 저마다 다른 형상의 꽃이자 개체들이다.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흔들리며 떠도는 꽃이란 존재는 주어진 틀 안에서 자유로운 생/자아를 갈망하는 제스처, 한정된 제도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저마다 일시적인 삶이란 틀에서 부유하다 소멸해가는 인간존재를 상징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각형의 프레임에 갇힌 꽃은 일정한 규범이나 틀 속의 자아일 수도 있다. 또는 자신만의 기억과 추억의 영역에 해당하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꽃/양난은 작가 자신의 분신인 셈이다. 그런데 이 양난은 정면에서 포착되어있기 보다는 주로 뒷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시선은 꽃을 보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있다. 그것은 존재의 이면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암시한다. 작가는 말하기를 양난이란 존재가 군더더기가 없이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고고한 아름다움을 지녀서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양난의 뒷모습이 더 없이 좋다고 말한다. 그 모습은 흡사 사람의 뒷면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의 참모습이거나 그의 얼굴 안에 가려진 그늘이자 그림자, 영혼 같은 것의 은유인 셈이다. 또는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한 존재의 진실, 혹은 기억과 아스라한 추억일 수도 있다. 마치 사람의 뒷모습을 훔쳐보듯, 작가는 양난의 ‘뒷태’에서 그 무언인가를 발견했다. 하얗고 긴 목, 작은 귀, 머리카락만이 보이는, 얼굴이 지워진 그 누군가의 뒤/얼굴 뒷편을 본다는 것은 어딘지 애상하고 쓸쓸함이 뭍어나는 일이다. 오히려 얼굴 뒷편이 더 진실되다. 이렇듯 최윤정은 양난이란 소재와 이중의 화면구조를 통해 자신의 기억에 대해, 이미지화하거나 또렷하게 언어화할 수 없는 그늘/그림자를 그려보인다.

비단이란 투명하고 얇은 재료는 그림 그리는 이의 신경과 감각을 보다 더 예민하게 만든다. 실수나 반복을 허용하지 않는 재료이기에 그 일회성의 집중은 다른 재료에서의 그리기와는 다른 체험을 안긴다. 작가는 비단이란 재료의 속성과 자신의 감수성이 일치하는 부분을 발견하고 있는 듯 하다. 한편 즐겨 그리는 양난은 향기가 없는 꽃이다. 따라서 작가는 꽃의 향기를 시각화하는 방법으로 비단 위에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부드럽게 잔영처럼 흔들리는 결의 피부위에 조심스럽게, 공들여 그린 양난은 그 바탕의 재질위에서 비로소 자신이 지니지 못한 향기를 시각적으로, 나아가 촉각적으로 보여주려는 듯이 연출되고 있다. 또한 비단이란 알다시피 종이의 조직과 달리 직조된 결들이 투명하게 비춰지는 화면이다. 그 틈을 벌리고 육박해 들어가면 작은 사각형의 프레임으로 해체될 것이다. 마치 캔버스 천의 조직과 같은 셈이다. 그러니까 작은 격자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작가의 화면은 그 비단이란 물질의 특성, 존재론적 조건을 이용한 작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단을 크게 확대해서 보는 이의 눈과 몸을 그 안쪽으로 불러들인 형국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이나 캔버스가 안쪽에 자리하고 있고 그 위를 비단으로 덮어 이중화면을 연출하고 있는 이 작업은 비단이란 재료를 통해 투명하게 안쪽을 보여주면서 안쪽과 표면에 자리한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인지시킨다. 그동안 그림이란 결국 하나의 절대적인 화면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면 이를 흔드는 방법은 화면을 복수로 연결, 반복시키거나 내부를 보여주는 외부가 공존하는 화면이 된다. 따라서 최윤정의 화면/프레임 역시 작은 화면이 복수로 연속되거나 화면 안에 또 다른 화면을 집어넣는 형국으로 연출된다. 이때 안과 밖의 이미지는 서로 연계되는 이야기에 의해 유지되고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그런 측면에서 작가의 작업이 전통적인 프레임, 즉 병풍이나 두루마리, 족자 등이 보여주는 놀라운 시방식과 시간과 기억의 저장 등에 대한 더 많은 이해와 연결된다면 무척 흥미롭게 풀려나갈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나로서는 캔버스 천에 오드리 햅번의 이미지에 위에 비단 천을 씌워 이중화면을 만들어놓고 그 표면에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채색으로 그려놓는 최근 작품에서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듣는다. 한때 화려한 은막의 스타, 아름다운 얼굴이 이제 세월이 지나 흡사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과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작업은 아련함과 무상함, 시간의 힘 등을 읽어내게 해준다. 소박하지만 간결하고 정확한 내용 전달과 압축된 연출에서 시각적 흥미도 발산되는 그런 작품이다. 앞으로의 여정을 예감하게 해주는 그런 징후다.

2009. 10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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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