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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비판적 논평의 시도”

예술가이며 교수 그리고 전시 기획자인 김재관 작가를 만난 것은 그가 운영하는 한국의 유일한 기하학 미술관 중 하나인 청주의 쉐마미술관에서였다.

끝없이 온실 채소밭으로 덮인 사각형 들판의 기하학적 농촌 풍경의 반사된 구름 아래 그 한가운데에 흰 사각형의 현대 미술관이 보인다. 그리고 `흰색 사각형`에 또 하나의 흰색 사각형은 그의 스튜디오이며 여기서 그는 자신의 `기하학` 예술세계를 말한다.

바로 여기서 여러 사람의 몫을 맡으며 인생을 깊이 있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70대의 작가의 세계를 발견한다.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면서 프락탈 기하학(Fractal geometry), 절대주의 (Suprematisme), 메타 기하학 (Metageometry)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에 관해 앞서 글을 쓴 비평가들과 현대 최정점 과학과의 병행에 대한 거론에 대해 공감한다. 나는 실제로 양자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이태리인으로서 기하학적 사상의 역사적 기원을 고대 로마 시대를 통해 짚어 보고자 한다. 김 재관 작가의 작업을 보면서 신 플라톤주의의 대표적 철학자인 로마시대의 플로티누스(Plotinous)를 생각한다.

김재관의 작품세계의 복합성과 단순성을 철학적 측면에서 고찰하기 위해 프로티누스의 저작 ≪엔데아데스≫ ‘Enneades”를 거론하고자 한다.

()는 관념 세계 속에 존재한다

플로티노스[Plotinus],(AD 254-270)는 모든 저서를 로마에서 집필했다. 그의 저서들은 제자들을 위한 교재로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플로티노스 사후 그의 철학 사상을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제자들 중 하나인 포르피리오스(Porphyre)가 피타고라스의 완전수인 6으로 6개론과 소수 9로 9문집인 상징적 숫자의 54권의 책을 냈다. 이러한 숫자 뒤에는 제자 포르피리오스의 편집증적으로 스승의 철학을 완벽하게 보이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이 사상의 주제인 ≪엔네아데스≫는 도덕, 자연세계, 영혼, 지성 그리고 ‘하나’의 중심 사상들이 다른 사상으로 자연스럽게 변화, 발전하는것을 보여준다.

‘하나’(l’Un)는 모든 존재가 파생하는 제 1원칙이었다. 플로티노스에게 초월적 차원은 모든

존재가 소유하고 있는 특성, `하나`는 존재를 넘어서는 제 1원칙이다. 하나`의 개념은 일신론적 종교에서 나타나는 유일성 근본 원리로서, 제 1원칙은 절대자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인간 지성의 내면적 응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즉, 일반적 경험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조화를 달성하기 위해 직관적이고 지적인 변화를 말한다. 그의 저서들은 영적인 미학적 시점에서 철학적 사고로의 접근을 제시한다. 즉 인간이 아름다움 그 자체를 이해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는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인 지각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우리의 이성적 내면의 지적 세계로의 회귀, 본질로의 회귀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육체적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육체적 아름다움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며, 흔적이고, 그림자라는 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이 아름다움이 어떤 뜻있는 이미지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플로티노스, 엔네아데스) 하지만, 영혼을 통해 바라보는 능력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능력은 학습을 요구하며, 이 플로티노스 철학의 ‘학습’은 정점과 저점 사이의 움직임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플로티누스는 그것을 발현(PROCESSION)이라고 부른다. `하나`는 다자를 향해 분산되어 점차적으로 어두워진다. 그러나 동시에, 각 요소 (물론 `하나` 제외)는 원칙으로 돌아가 위로의 상승을 추구한다. 즉, 그가 전환이라고 부르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각 요소는 자신의 개체를 되찾는 것이며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발하는 것이다.

기하학적 양식의 다른 여러 현대 예술가들의 작업들과 같이, 김재관의 작업에 대한 정형화된 반복적인 분석과 비평글들이 많이 있었으리라 본다. 우리는 김재관의 작품들 속에서 정점과 저점 사이의 움직임을 주시해 보기로 한다. Nature Secretness (acrylique de 2010) 작품을 보면 하늘과 땅을 구상적 방식으로 표현하였지만 김재관 작가의 45년간의 작업 의식의 코드를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 비밀스러운 큐브`라고 명명된 그림들과 함께 다년간의 큐브 모음의 작품세계 – 큐브 안의 공간, 큐브의 신화 -에 대한 정신적 열림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점에서 가까이 지냈던 작가 메타 기하학의 창시자인, 러시아 작가 에딕 스타인버그를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에게 있어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CarréNoir)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고독을 나타내고 있었다. 초기에, 이 사각형은 아무런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미술사의 뜻있는 대표적 작품들이 종종 그런 것처럼, 이 작품은 수많은 해석을 불러일으켰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매우 회의적이었다. 말레비치 자신은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검은 사각형( CarréNoir)을 해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흑백의 대조가 최대치로 보이는 지점에서, 말레비치는 어둠으로써 빛 그 자체가 사라지는 무색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전제군주제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인 그시대 러시아의 민감한 주제인 계몽에 대한 비평인 것이다.

관념론자들과 잔소리를 늘어놓는 설교자들을 비판하는 말레비치의 글에서, 그가 1920 년대에 인민의 교육을 비판하는 첫 번째 지식인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절대주의(supréatisme )의 빛은 조직된 이데올로기적인 지도자의 지식적 계몽으로 인민의 눈을 가리고 무지에 빠뜨리는 그들을 남겨둔 체 어둠같이 완전히 사라진다.

1967 년 20살 되던 해 김재관은 ‘추상’(Abstract) 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을 보면서 그의 후속작들이 어떻게 적합하게 조화를 이루고 발전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추상`은 하나의 그림 자체 이기도하고 , 또는 다양한 객체의 공통적인 요소의 통합, 분리 혹은 구분에 따른 하나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추상’과 같은 시기의 다른 작품들로써 1969 년부터 김재관은 <Relationship>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해 동안 연작의 작업하였다. 1969년도에 이러한 제목을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1969년은 달에서 인간의 첫걸음을 디딘해 였고 반핵(反核) 주의에 의하여 기하학적이고 상징성을 띤 ≪Peace and Love≫ 라는 로고 같은 상징표가 탄생하였고 ` 사랑과 평화`가 보편적 상징으로 되는 해였던 것이다.

2008 년에 « Space in cube N°18 »과 함께 김재관은 잠시 쉬면서 수백만 번 팽창하고 변화하는 원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나비 효과의 `순간적` 제로와 같은 하나의 원칙이 이 작품에서 발견된다.

그의 주된 원칙은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시각의 작품들, 즉 바둑판같은 반복된 사각형들, 바로 그것이다. 특히, 2017년의≪Relation-Fiction≫에서 플로티노스의 가르침들을 적절하게 나타낸다. 이 작품은 자신의 외부와의 관계적 세계와 자신의 육체 안에 심리적 세계를 바탕으로 한 자아의 표현이다. 이는 바로 상호적 공간이며 상상과 지각적 활동의 만남이다. 이런 세계를 상징하는 작품들을 2017 년 이후부터 김재관은 이브 끌렝(Yves Klein)의 푸른색(IKB)이나 검은 갈색으로 접혀진 사각형들을 단순한 캔버스가 아닌 부조로 빛, 색이 투영되게 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

글, 질 바스티아넬리 (Gilles Bastianelli)
번역, 안은희 / Galerie 89 Pari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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