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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생 개인전

참여작가 : 강호생
전시 기간 : 2011년 11월 5일 ~ 2011년 11월 20일 (월·화요일 휴관)
전시장소 : 쉐마미술관

김상철 미술평론가 평론


작가노트

생명력-수묵에 대한 빛과 시간의 역사

-Concept of Working-

강호생

언제부터인가 그림들이 획일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무척 다양한 가운데서 오히려 가장 단순적 획일화를 발견할 수 있는 지금의 미술풍토는 어찌된 것인가? 역설과 반어가 반복적으로 섞여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다양성이라는 외침이 왜 더욱 초라할 정도로 단순성으로 침몰하고 있는 것일까?
작금의 세계적 미술풍토는 자존이 퇴색한 유행을 타며 나오지 못할 거대한 블랙홀에 삼킴을 당하고 있다. 혹 이 모습은 내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지구에 사는 우리 화가들의 모습일까?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이 무것이며, 앎이 또한 무엇인가? 노마드가 지속성을 띠었을 때는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사람은 얼른 공허에서 탈출하려는 의식이 따른다. 동물은 그 자체가 타협에 본질적으로 능하다. 동물적 속성을 지닌 사람도 이에 벗어날 수는 없으며, 자존조차도 의식치 못한 채 타협에 본질적으로 능하다. 동물적 속성을 지닌 사람도 이에 벗어날 수는 없으며, 자존조차도 의식치 못한 채 타협에 재빠르게 된다. 모든 이러한 결과는 착각적 다양추구의 산물이 획일적 단순을 생산하고 말았닫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존재 재확인이라는 것에 대한 탐구심이 따른다. 거슬러 올라가보자.
역사성, 다양성, 스타성, 예술성, 철학성 등등은 사실 지금까지 이미 세대 전부터 반복되고 있다. 특별히 더 낳아졌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때마다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약정모순이 지속되고 있고, 그 가운데에 시간이 개입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지속성의 시간과 공존하기에 나는 때론 무책임의 자유를 따르기도 하는 방종을 즐기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 방종의 자유가 없다면 나는 붓을 들 이유에서 제외된다. 방종속의 유희는 거듭되는 나를 산출하게 한다.
나를 산출하는 모체는 수묵이다. 나는 지금부터 나의 모체를 말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그리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림이 그려질 재료의 한계성을 연구하는 일이다. 재료의 특수성을 모르면 자신이 표현하고 싶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갖은 종이의 생리를 알아야 하고, 붓의 종류와 특징, 먹의 장단점, 심지어 벼루의 재질도 중요하다. 동일한 먹으로 어떤 벼루를 선택하는가에 따라서도 색감, 무게 온도 등이 다르다. 특히 필선의 엄청난 변화의 제약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모두는 먹과 물의 양, 필선의 속도, 힘과 유연성, 상하좌우의 톤의 균형, 물질간의 시간차 등 초 감감적 테크닉과 직관적 감성을 동반치 않고서는 범접치 못하는 영역이다. 물론 이런 영역을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런 세계를 이해만 하는 단계에 머무른다. 여기서 나는 절대고독이라는 것과 만난다.
이번의 작품 형식은 내가 1982년부터 시도했던 것들의 결과이다. 시간의 역사, 흐름, 물방울의 이동과정, 시간의 흐름,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물방울의 형상과 흔적들, 각 각의 물방울 형상과 그 밖의 형상은 이야기 하듯 살아있다. 서양화 캔버스가 아닌(표면에서 바로 발색하는 것이 아닌) 동양화 특유의 맛(즉 흡수해서 다시 토해나는 발색-상당히 깊이가 있고, 무겁고, 오묘한 먹의 발색효과)을, 어찌 보면 맑고, 선명하고, 투명한 물방울이 번지고, 선명치 못한 수묵을 통하여 엄청난 모호함과 아우리를 뿜어내는 효과를 만든다. 여기서 나는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재수정하고, 우연과 필연의 뗄 수 없는 상보관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한다. 이렇듯 인체의 배경과 합치된 물방울과 또 다른 이미지들은 빛과 시간을 간직한 ‘생명력’을 표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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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