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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이중성” : 나르시시즘과 시뮬라크르

1.
연구자는 연구 작품 「Barbie」시리즈를 통해 여성성(femininity)에 대한 회화적 탐구를 시도한다. 여성성을 논함에 있어 여성의 외모를 따로 분리하여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여성의 외모에 대한 미적 기준과 직결되는 요소로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기준은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나 문화적 풍토와 관련되어 나타나며 시대에 따라 그 기준 또한 다양하게 변천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사회에서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간주되는 여성의 몸은 그 시대가 이상시하는 여성성의 내용을 토대로 형성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와 같은 여성의 이미지는 그것이 주술적인 용도이든 예술작품으로 제작 되었든 여성의 이미지들이 이상화된 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는 여성의 실존과는 무관한 시대의 조작에 의해 이상화된 여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시뮬라크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세상의 모든 비너스는 시뮬라크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성이 이상화된 도상은 무엇인가? 연구자는 그 중심에 바비인형(Barbie Doll)을 오늘날 여성들이 추구하는 미적 표상이 구체화된 뷰티 아이콘으로 설정하고 작품에 차용한다. 여기서 연구자가 바비인형으로 오늘날 여성성의 주요 특징으로 삼고자하는 것은 오늘날 여성들의 욕망의 메커니즘이 미디어 이데올로기에 의해 흡수되어 시뮬라크르적으로 표상되고, 이는 다시 나르시시즘으로 회귀되는 변증적 알레고리의 동태적 측면으로 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소비대상의 파노플리(panoplie) 중에는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고 귀중하며 멋진 사물은 바로 ‘육체’다. 오늘날에는 육체가 광고, 모드, 대중문화 등 모든 곳에 범람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육체가 그러하다” Jean Baudrillard, 이상률 옮김, 『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 1999. p.208.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소비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육체’, 즉 ‘피부’라 함은 모든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따라서 여성들의 미적 욕망을 실현하여 나르시시즘에 이르는 소비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은 바비의 육체를 소비한다. 그러나 결국 여기서 궁극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바비인형의 미적인 기호 가치, 즉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피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바비인형의 미적 기호에 대한 ‘파노플리 효과’(effet de panoplie) 여기서 파노플리효과(Effect de Panoplie)라 함은 바비인형의 미적인 기호가 여성의 육체의 이상화된 도상으로서 최신의 트랜드 역할을 하는 체제 내에서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바비가 지닌 미적 기호를 소비함으로써 모두가 바비화되어 감에 따른 무의식적 집단의 원형이 되어감을 의미한다.
는 여성들에게 몸 위에 최신의 유행이라 할 수 있는 ‘피부’라 불리는 ‘의상’을 덧씌우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바비의 커다란 눈과 가냘픈 턱선, 풍만한 가슴, 오뚝한 코, 앵두 같은 입술 그리고 긴 다리와 잘록한 허리는 오늘날 여성의 아름다움의 대명사로서 욕망을 향한 미적기표로 작용하여 소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바비인형은 그 자체가 지시대상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생산된 이미지의 코드로서 해독해야 하는 기호화된 여성성의 ‘피부’라 할 수 있다.

2.
연구자가 작품에서 차용하고 있는 바비인형은 작품 안에서는 더 이상 인형이 아니다. 이는 작품 속에서 그 정체성이 변용되어 재맥락화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위상을 부여받는다.
‘차용’(借用, appropriation)이란 ‘빌린다’는 의미로 미술사적으로 볼 때 뒤샹의 <샘 Fountain>이 그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made) 혁명 이후 미술계는 커다란 변혁을 맞이하게 되고, 결국 미술이란 작가의 행위 없이 선택만으로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확장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뒤샹이 제시한 레디메이드의 다다적인 제스처는 기존의 작가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그 아류로서 예술과는 무관한 일상적인 오브제와 상업적 이미지들이 미술작품에 등장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팝아트이다.
주지하듯이 팝아트는 소비사회와 대중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전까지는 예술과는 무관했던 각종 광고 이미지나 일상적인 오브제들을 작품에 차용한다. 그러나 이렇게 예술과는 무관한 일상적인 오브제나 이미지를 예술 작품으로 차용하는 것은 미술 작품의 오랜 전통이었던 독창적이고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거대서사(grand narrative)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고 미술의 철학적 본성과 정체성의 물음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탈 역사적 미술(post-historical art)’ 로 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상적 오브제가 예술의 당위성을 획득하게 되는 원리는 무엇인가? 단토에 의하면 “이러한 세속적인 것들은 예술가의 감각 경험에 의한 사고(thought)의 논리 속에서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켰을 때, 비로소 그것들은 예술 작품이 된다고 한다.” Arthur Danto, 이성훈, 김광우 옮김,『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문화. 2006, p.59.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뒤샹의 <샘>이 변기라는 본래적인 속성을 잃고 정체성이 변용되어 예술작품으로 재맥락화 되었듯이, 연구자가 연구 작품에 차용하고 있는 바비인형 또한 더 이상 인형으로서의 사용가치나 상징가치로서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따라서 연구 작품「Barbie」시리즈 안에는 더 이상 바비인형은 없다. 바비인형은 탈(脫)물질화되어 그것이 지닌 즉물적인 지시대상은 사라지고 바비의 기표가 함축하고 있는 여성성이라는 기의로 의미화 되는 기호로서의 표상체만 남는다.

3.
들뢰즈(Gilles Deleuze)가 욕망이 근원적으로 발생하는 장소는 ‘신체’라고 지적하듯이 인간의 몸은 욕망과 직결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리비도적 충동에 의해 나르시시즘적으로 발현되든 혹은 타자의 욕망을 위한 타자지향적인 것이든 인간은 그것을 의식의 저편으로부터 끌어내려 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은 유아기를 지나 사회적인 존재로 영입되면서 사회가 금기시하는 욕망을 억압하게 되는데, 이때 억압된 욕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남아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그러나 라캉의 ʻ상상계ʼ는 ʻ상징계ʼ로 진입하면서 사라지거나 프로이드의 경우처럼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된다. 상상계는 거울 속에 비친 영상과의 동일시 혹은 원초적인 질투가 벌이는 극적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때 유아는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종속시킨다. 라캉에게 ʻ실재계ʼ(the Real)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의식은 출발을 상상계라는 오인(méconnaissance)의 구조로부터 시작하기에 자아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절대적 주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형성에서 거울단계의 설정은 데카르트의 이성 절대주의는 물론이고 실존주의나 현상학이 암시하는 실존적 자아까지도 거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이 오인의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지 않은 흠집 없는 이성, 혹은 현실원칙에만 굳건히 서 있는 의식의 체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Jacques Lacan, 『욕망이론』, 권택영 엮음, 문예출판사, 2009, p.16.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체라는 기존의 개념에서 타자의 욕망이 되기를 원하는 욕망하는 주체로 나아가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자율적인 존재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의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이를 소외(aliénation)라고 부른다. 즉 타인의 욕망에 의해 소외되어 있는 한 주체는 아직 진정한 주체로 태어나지 못함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3, pp.74~75참조

이렇게 볼 때 연구자가 제시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은 일견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여성성을 실현하고 있는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 스스로 주체가 된 욕망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며, 여성들이 욕망하는 것은 여성 자신이 아닌 타자 즉, 남성 혹은 제 삼자로서의 여성들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스스로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제 삼자의 욕망으로부터 분리(séparation)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연구자가 말하는 욕망의 이중성이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며, 결국 여성들이 바비의 기표를 소비하며 그것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것은 여성 주체로서의 욕망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습은 볼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기억의 잔상에 남은 이미지로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자화상은 바로 이 사실에 의거하여 ‘자아’를 투영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알레고리적 충동에 의해 비재현적인 기표들의 차이 짓기 놀이일 경우, 자화상은 우리의 의식에 주어진 리얼리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위상을 지닐 수 있다.
프로이드가 “창조자는 놀이하는 아이와 동일하다”라고 말하듯이 결국 연구자 또한 캔버스위에서의 원초적 놀이의 유희를 통해 캔버스라는 거울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연구자의 놀이는 무의식적인 욕망의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인도되며, 대상에 스스로를 투사(self-projection)하는 알레고리적 충동에 의해 나르시시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바로 투사이다. 이것은 외적인 기표작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작품 속의 바비는 더 이상 인형의 속성을 잃고 화면 속에서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되어 새로운 위상을 지니게 된다.
연구자가 작품 안에 재현하는 바비는 연구자 자신을 투영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연구자 자신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바비는 단지 연구자 자신 혹은 여성들의 욕망을 구체화 시켜주는 매개체로서 기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연구자는 바비인형이라는 오브제를 빌려 자기 동일화라는 나르시시즘의 알레고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다양하게 객관화 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연구자 자신이 아닌 여성들의 욕망의 구현체로서의 여성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연구자의 작품 「Barbie」시리즈에서 자신은 ‘보는’ 존재임과 동시에 ‘보여 지는’ 존재가 되며, 이때 투사된 자아의 이미지는 이상적 자아로서 ‘보이지 않는 자아’의 투영체, 즉 타자의 욕망의 대상임과 동시에 자아가 욕망하는 타자라 할 수 있는 이중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4.
인간의 삶은 사회적 범주 속에서 규정되어지듯이 여성성에 대한 기준 또한 절대적 기준이 없이 시대가 요구하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변천 과정을 통해 변이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오늘의 시점에서 논할 수 있는 여성성이란 대중매체를 매개삼아 시뮬라크르적으로 재현되어, 여성들의 나르시시즘 속에서 발현되어지는 시대의 허상이라 할 수 있다.

박사논문 중에서
글, 이 상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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