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바우하우스를 위하여
― 쉐마미술관 기획 제11회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특별전,
‘ART BRIDGE’— “다시 바우하우스를 만나다”에 즈음하여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어언 제11회를 맞는다. 그 부대행사로 <와우21세기회>가 쉐마미술관기획으로 특별전 ‘ART BRIDGE’ ―“다시 바우하우스를 만나다”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명실공히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청주에서 재연한다는 데 의의가 크다. 필자는 이에 아래와 같은 축하의 메시지를 상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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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2019년이 미술사, 나아가서는 오늘의 시대사에서 어떠한 의의를 갖는 지를 이해하려면 지금으로부터 일 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보는 방법과 그 역으로 향후 일 백년사의 미래를 예측해보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전자와 후자를 연계시켜 그 중간쯤에서 오늘의 의미를 예단하는 건 보다 뜻있는 게 될 것이다.
전자부터 생각하자. 2019년에 일 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19년을 만난다. 이해는 독일 바이마르에 발터 그로피우스가 국립바우하우스를 세운 해다. 주지하는 바,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가 이해에 설립해서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까지 약 14년을 존속했다. 지금은 잊어선 안 될 사적유산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 시기는 그래서 현대사에서 부침이 그만큼 컸던 시기였다.
당시 그로피우스는 베를린 출신의 36세의 젊은 건축가였지만, 그가 아주 어린 시절인 1907년엔 「독일공작연맹」을 수학하면서는 줄곧 세월의 절박함을 느껴야 했다. 선진 산업국인 영국의 산업발전을 벤치마킹하고자 독일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시작으로 성년이 되자 그는 미술⋅공업⋅수공예를 융합함으로써 영국보다 향상된 공업제품을 생산하는 미래를 꿈꾸었다.
이 이념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리오넬 파이닝거(1919)를 시작으로 이어서 파울 클레(1920), 바질리 칸딘스키(1922), 요하네스 이텐(1923), 라슬로 모호이너지(1923) 같은 당대 굴지의 작가들을 국적을 불문하고 바우하우스에 집결시켰다. 이들을 그는 흔히 교수라는 칭호대신 마이스터(장인)라는 이름으로 칭하기를 선호하였다. 이렇게 해서, 당대의 어지러웠던 혼란기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이라는 그들의 20세기 비전을 구현하는 데 집념을 보였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바우하우스는 마침내 폐쇄의 비운을 맞았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운명적인 위축을 면치 못 하다가 오늘날에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의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한 시대에도 하늘을 찌를 듯 했던 그들의 창조적 열정은 길이 남을 창의 교육의 전범(典範)으로 기억되고 있는 건 지금이나 미래에나 결코 과소평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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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21세기에 즈음해서 우리가 성찰할 건 미래의 바우하우스의 유산이다. 오늘의 21세기는 바우하우스의 비전이었던 서구 근대주의와는 모든 면에서 궤를 달리하고 있다. 이 추세가 전성기의 바우하우스 이래 오늘에 이르기 까지 줄잡아 반세기의 시간을 여과하고 있다. 자세히는 20세기 후엽 이래 바우하우스 후예들이 내건 탈근대주의를 비롯한 글로벌리즘이 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들의 추세와 미래는 현재의 평가에 관한 한 암담하고 우울하다.
이에 즈음해, 바우하우스의 유산을 다시 생각하는 건 그럼에도, 하나의 굳건한 대안이 아닐까?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이를 대안으로 생각함에는 탈근대주의 이후 만연한 회의주의를 어떻게 잠재우느냐가 목표다. 이를 염두에 두었을 때 근대주의라는 서구중심의 보편적 이념이 쇠퇴하고 지역중심주의가 이를 대신하는 데 즈음해 우리가 기대하는 21세기 바우하우스는 험난한 길을 예상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이를 해결하는 데는 1990년 초 이래, 와우산 캠퍼스에서 이 방면의 최고 학위과정을 동문수학하던 노하우가 큰 자산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주역들이 <와우 21세기회 창립전>을 갖는다는 건 그 뜻이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다시 바우하우스를 만나다’는 부제를 제기함으로써, 바우하우스의 유산을 견인하고 이를 미래에 신장시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안을 마련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전 세기의 바우하우스가 지향했던 미술⋅공예⋅산업⋅기술과 같은 다장르의 연계와 통섭을 21세기라는 변경된 시대에도 여전히 가능한 지를 그들은 답하리라는 것이다. 최소한에서라도 이러한 의도를 배경에 두고 이 이념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 지를 궁구한다는 것은 그 의의가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이를테면 바우하우스가 일백년 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1870년대 직후 새 에너지원으로 크게 부상했던, 전기를 이용한 대량생산을 기대하는 제2차 산업 혁명기였기에 가능했다는 것 말이다. 자세히는, 20세기 후기인 1969년 이후 인터넷과 컴퓨터에 의한 정보화와 자동화시스템이 강조하는 제3차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이전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지금의 21세기는 2~3차 산업혁명의 수준이 아니라 로봇과 AI, 그리고 실제와 가상을 연계하는 가상물리시스템을 중심으로 하는 제4차 산업혁명기를 맞고 있어, 그 가능성이 보다 고난도의 기대를 예상케 한다. 이처럼 격변에 가까운 정황 속에서 21세기 바우하우스는 과연 가능한 지와 또 어떻게 해야 가능한 지는 간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타개하는 거야 말고 와우21세기회의 존재이유가 될 것이다.
그 두 번째는 전 세기의 그것과 오늘의 그것 사이에는 세계관의 차이라는 미증유의 갭이 놓여 있다는 걸 직시해야 할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전 세기의 바우하우스가 가능했던 건 뉴턴의 고전역학과 데카르트적 사유라는, 이른 바 절대의 시간과 공간개념을 정착시키려는 이상과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오늘을 지배하는 건 시공간의 절대개념이 아니라 불확정성과 확률을 기초로 하는 양자역학적 세계이해를 근저에 두고 있다. 오늘의 바우하우스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를 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이야 말로 최대의 난제가 아닐 수 없기에 와우21세기회에 거는 기대는 어느 때보다 크다 할 것이다.
그 세 번째는 이러한 제 정황을 고려하더라도, 오늘의 글로벌 풍토가 요구하는 로컬리즘의 요구를 수락하는 일은 또하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바우하우스라는 이름 하에 장르간 융합과 통섭을 시도하는 일이야 말로 중대한 과제가 될 것이다. 아니 이는 또하나의 모험이 아닐 수 없으리라. 특히 이를 한국의 전통토양이라는 로컬리즘의 지평에다 탑다운해야 하는 기대는 무엇보다 크다할 것이다. 이에 대처하는 길은 여전히 ‘세계는 하나’라는 근대기에 회자했던 세계주의(cosmopolitanism)에 의해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위에서 우리 시대의 트렌드인 ‘글로벌로컬리즘’(global localism)을 구현하는 일이야 말로 와우21세기회가 풀어야할 가장 최대의 과제라 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금번 쉐마미술관 기획 제11회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특별전의 일환으로 갖는 ‘ART BRIDGE’ ― “다시 바우하우스를 만나다”를 위한 <와우 21세기회 창립전>에서 기대한다면 이는 과한 것일까? 생각하건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21세기회야 말로 세계가 풀어야 할 몫을 그 스스로가 짊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일찍이 최고 학위과정을 수학하지 않았던가? 당시에 품었던 이상과 꿈이 오늘날 <와우 21세기 창립전>에서 “다시 바우하우스를 만나야” 할 이유라 해서 충분하리라. 우리는 확신한다. 그리고 기대한다. 와우 21세기회여 건투하라!
2019. 6
김복영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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