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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한 경계(OBLIQUE BOUNDARY)

참여작가 : 강주형, 김윤호, 나수민, 이승훈, 홍가람
전시기간 : 2020년 5월 1일 ~ 2020년 6월 14일 (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 쉐마미술관
관람시간 : 오전 10시 ~ 오후 6시 (30분 전 입장 마감)
후원 : 충청북도, 충북문화재단


온라인 전시



전시내용

‘비스듬한 경계’

‘비스듬한 경계’는 ‘오늘날의 회화는 그야말로 다원적이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지금의 예술은 매체 활용에 있어 경계 없이 무한 확장하듯 멀티플 한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모더니즘을 거처 포스트모더니즘의 급변하는 세상 속, 현대미술의 개념이 무한 확장한 이 시대에도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회화라는 것이다.

‘비스듬한 경계’는 전통 매체인 회화 작업을 하면서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들과 초평면의 화면 위에서 애니메이션 기법들로 회화적 시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다섯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다. 강주형, 김윤호, 나수민, 이승훈, 홍가람, 다섯 명의 작가들은 작품을 통하여 지금의 현대미술의 회화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한다. 참여 작가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의 사회적 이야기, 그 사회에서 부딪치는 개인사적 문제들과 시대의 문화적 코드로서 만화들을 새로운 소재로 삼아 각자의 시각적 방법으로 재탄생된다. 이러한 시도는 현대미술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의 체계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확인하며 지역의 관람객들에게 확장된 시각예술의 감상의 기회를 만들며 공유하고자 한다.

강주형 작가는 익숙한 시간과 소재, 그것들이 가지는 운동성을 ‘시간-회화’에 보여준다. 사회 속, 생활 속 대상들은 움직임을 획득하고 켜켜이 색을 쌓아간다. 기존의 대상들은 작가의 직조에 의해 새로운 대상으로 탈바꿈된다. 익숙한 형태나 움직임의 재현이 아닌 새롭게 생산된 대상들과 그 대상들이 운동하는 표면을 제시하며 작품 속 대상들은 각각의 시공간 속에 고립을 자처하는 동시에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강주형 작가의 이런 이미지들은 캔버스가 아닌 디지털 매체 위에 붓질의 반복과 실험을 거치며 확장된다.

김윤호 작가의 창작 작업은 작가가 평소 즐겨 하는 배드민턴에 기반을 둔 만화적 상상력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가 성장해온 시대의 문화적 코드로서 만화라는 매체를 중시하고 그 팝 컬처로서의 정서나 문법에 익숙하다. 무엇보다 J-Pop의 만화, 가령 <핑퐁> <오버로드> <헬퍼> 같은 분방한 오타쿠적 감성은 인간 몸체와 다른 몸 그리고 변신의 자유로움, 공간적 변환의 자유로움, 관점 이동의 자유로움을 순수하게 표현한다. 셔틀콕의 깃털에서 시작하는 그의 상상력은 생명의 원류적인 흐름으로까지 나아가 그 속도감의 소리까지 만화적 상상력으로 작가만의 미디엄으로 보여준다.

나수민 작가는 청년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다. 최저임금 이슈와 청년 노동, 사회와의 소통을 거절하고 고독을 선택한 청년들의 일상을 담아낸다. 사회적인 메시지에 치중하여 화면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방법에서 나아가 초현실적 표현 방법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청춘이 있는 반면에 사회와의 소통을 거절하고 소외를 선택한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러한 생각은 작품을 핑크빛으로 담아내며 모든 것을 위로해 줄 회화 속 작가만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이승훈 작가는 작가가 체험한 일상의 기억의 단서를 근거로 여러 개별 이미지들을 만들어 화면에 보여주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노상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잔뜩 취한 모습으로 졸고 있는 남자나 플라타너스와 나부끼는 이파리, 걸어가는 사람들과 물을 토해내는 분수 등 일상의 기억 이미지들을 하나의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고 개별 이미지들로 화면에 부유시켜 보여준다. 이때 작가는 사실적 표현이 아닌 멈추는 일이 없는 대상을 관찰하고 지각하는 과정을 통해 초평면의 화면 위에 정확한 재현이 아닌 애니메이션을 넘어 회화적인 화면으로 보여준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재현’이 아닌 ‘그리기 과정’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바라보는 사회 풍경들은 극도로 확대한 화면의 픽셀 앞에서 태블릿 펜을 쥔 채 진행된다.

홍가람 작가는 현재의 상업적인 애니메이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작가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영화를 이루는 전체로서의 몽타주에서 쁠랑이라는 운동-이미지들을 해체하고 조합하여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처럼 재구성한다. 혹은 하나의 ‘그림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화화 그림의 사이 어딘가쯤에 위치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상을 ‘상영한다’라기보다는 ‘위치해 있다’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전시와 상영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형태로 접근하기 위하여 홍가람 작가는 독립된 디스플레이 장비를 통해 하나의 그림처럼 반복 재생되며 하나의 쁠랑으로 오브제화한다.

글, 한영애 / 쉐마미술관 학예실장

작가노트


그림을 그리는 도구라는 점에서 붓 또는 물감, 디지털 입력장치와 프로그램들은 나에게 이질적인 차이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 수많은 표현 도구 중 하나인 셈이다. 디지털 프로그램과 기계들은 유용한 방식으로 개발되고 끝없이 업데이트된다. 이러한 유용함이 디지털 페인팅이나 애니메이션 작업에 고정적인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프로그램들이 가진 유용한 방식의 기법보다는 불편하게 사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작은 단위의 브러시를 설정하고 포토샵 화면의 크기를 300% 키워서 하나하나의 터치를 쌓아간다. 마치 세필로 거대한 캔버스 화면을 조금씩 채워나가는 일이나 다름없다.

확대된 상태에서 쌓여가는 터치들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하는 형태들과 색들을 만들어낸다. 감각이 쌓여 회화적인 면을 구성한다. 디지털이라는 판판한 화면 위에 입력 신호들이 쌓여가는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손때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그림이 회화적으로 느껴진다면 이러한 촉지적 드로잉으로 인함이다.
애프터이펙트로 만들어내는 움직임 또한 나에게는 그림 그리기의 과정이다.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변곡점들을 찍는 일조차 촉지적 드로잉이라고 한다면 확대해석일까?

정지된 상태의 이미지는 사물의 한 측면을 포착한다. 내 작업은 정지된 이미지에 움직임을 부여함으로써 기존의 사물이 내포하는 성격이나 특성을 뒤틀린 형태로 표현한다. 인간성이나 풍경성을 배제하고 새로운 사물 자체를 만드는 것을 시도한다.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붓과 물감을 만지는 것과 서로 다르지 않다. 움직임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서사를 전면에 배치하지 않음으로써 움직임을 재현할 필요가 없으며, 서사의 자리에 사건이 자리잡는다.
모니터와 같은 하드웨어는 계속 발달한다. 나는 모니터라는 새로운 캔버스에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낸다. 작품에 직접적이면서도 독립적인 시간성을 부여한다. 나의 작업을 시간-회화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강주형

작업 <굴러가는 팔>은 평소 즐기고 있는 배드민턴의 스윙 동작들을 각각의 덩어리에 표현하고, 결합한 것이다. 계속 적으로 팔을 돌리는 배드민턴은 어깨에 무리가 오기 마련인데, 그때의 고통을 진화의 기회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코 트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가 돋고 있는 중인 팔을 제작해 보았다. _ 2019년 9월의 어느 날, ‘굴러가는 팔’ 을 제작하면서 –

김윤호

청년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 청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우리는 청춘은 핑크빛이라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그 핑크빛 청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들을 담았다.
<기다리고 있어>는 텅 빈 농구장 풍경을 7점으로 묘사한 연작이다. 추상적인 시간의 흐름만을 나타내기 위해 조금의 변화만 주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텅 비어버린 농구장 풍경은 그만큼 삶의 여유를 잃고 바쁜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 청춘을 잊어버린 청년들을 비유한다. 농구장은 그저 기다릴 뿐이다.

나수민

“시간-회화”에 대하여
회화는 자신이 어떤 모델에 대한 그림자임을 떨쳐내고, 복사물임을 향유하며, 스스로 빛을 내는 대상-시뮬라크르라는 사실에 이르렀다. 그리고 디지털 영화 장치는 어떤 스토리를 상영하기를 포기하고, 영화관 밖으로 뛰쳐나와 모든 벽면들을 점거하며 복사물들을 반복하며, 스스로 빛을 내는 실존적 대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새로운 대상을 화폭으로 삼고 그 안에서 거주하는 일…

우리는 회화적인 요소가 시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일로 이를 확장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그것이 시간이 가지는 무한성과 회화가 극복해내고 있는 물리적 한계들 ‘사이’에 단 번에 자리 잡는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낼 순 없는 걸까?

저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회화 작가들마다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런 질문에 대해 현대의 회화는 초고해상도의 디스플레이와 시간성을 질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어떤 탐스러운 물체-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작업은 화가 자신의 신체적 운동성과 시간이 터치로서 자신들만의 독특성이 드러나기도 하고, 디지털 화폭 속에서 만들어진 대상들이 다양하게 운동하며 발생 되는 운동성 그 자체도 역시 회화의 텍스쳐를 발생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캔버스 화폭 위에선 물감의 질감이 그 작가의 고유함을 드러내듯이, 디지털 평면 위에서는 운동으로 독특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운동-이미지, 운동-텍스쳐라는 개념이라 배우고 익혀오며 그것을 작업으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승훈

한국 가족에 대한 개인적 서사를 다룬 무빙이미지
한국 사회에 녹아있는 공통된 기억과 감성 중에 신파라는 이미지가 있다.
성장과 몰락의 경험에서 발생한 촌극 같은 가족 드라마는 소히 ‘한국식 가족’의 그림자다.
누가 보는지 모르는 신파 드라마가 여전히 괜찮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을 보면 마치 길티 플레져처럼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길티 플레져는 합리적이고 평등하게 바뀐 듯해보이는 오늘날의 가족에게도 여전히 마음을 동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과도기의 복잡다단한 군상이 도시의 세련됨으로 덮어졌지만 오늘날까지의 한국사회와 가족에 대한 이미지는 많은 레이어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 같다.
작업은 신파 이미지의 전근대적 낭만이 현대적이고 세련된 지금의 가족에게 무엇을 던지고 있는지 탐구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의 가족사를 모델로 할것이지만 딱히 무겁게 접근하고 싶지는 않다. 신파 드라마처럼 나 또한 클리쉐 잔뜩 들어간 ‘신파 상품’을 만드는 것이니까. 이는 사회에서 가장 사적이고 작은 단위로서의 ‘한국식 가족’에 대한 오브제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림의 영역 안에 있는 영상작업을 하고 싶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림과 영화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느낌이고 이에 적절한 형식이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한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독특한 롱테이크 화면이 기존 영화와는 다른 미학을 드러냈듯이 애니메이션 기법을 이용해 다른 지점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한 장 한 장의 프레임들이 양화되어 무빙 이미지를 만들어내다보면 애니메이션만이 갖을수 있는 특유한 그림의 서사성이 드러날 것이다.
전통적인 회화성에 얽매이기보다는 지금 시대에 이미지를 소비하는 감각과 수단을 활용해 유연한 상품을 만들어 내고 싶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그림의 ‘슈퍼 플랫’한 맛을 다양하게 즐겨나 가기 위해서.

홍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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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