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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연 개인전 ‘The Unseen Color Ulgae’

참여작가 : 전지연
전시기간 : 2016년 8월 25일 ~ 9월 18일
전시장소 : 쉐마미술관
관람시간 : 9:30 ~ 18:00 (30분 전 마감)


전시내용


구성과 색면을 통한 파라다이스의 메신저 -전지연-

전지연의 작품을 보면서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화가 피에트 몬드리앙을 떠 올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몬드리앙이 일상적인 <나무연작>의 풍경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단순화 시켜 선과 면, 색채만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추상의 조형세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사물을 수평선과 수직선만으로 생략하여 마침내 그 안에서 가장 이상적인 비례의 추상공간을 완성한 것이다.

전지연 작가도 일찍부터 <얼개>라는 테마로 자신의 회화의 모티브로 삼았다.

사전적 의미로 얼개란 어떤 사물이나 조직의 전체를 이루는 짜임새나 구조를 일컫는다. 전지연은 이 <얼개> 라는 구조를 통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색채와 형태에 실어 회화의 완성을 일관성 있게 추구 해왔다.

초기에 그녀의 작품은 이 <얼개>라는 형상에 아주 충실한 듯 <얼개>의 기본적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형식이 그녀가 생각하는 회화의 보편적인 질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작가는 “그림이란 비례와 균형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피에트 몬드리앙의 예술적 이념에 전적으로 동의 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 점에서 회화를 바라보는 전지연의 이해와 시각은 매우 보수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보여준 <얼개>는 보편적으로 일정한 틀과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그 형태에 예속되어 있지 않으며 형태들은 다분히 구조적이고 기하학적인 표현에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그 <얼개> 속에 작가 자신이 담으려는 그 언어, 즉 메시지가 곧 회화의 등가물로 인식했을 거라는 점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최근 그녀의 작품에 보여지는 <얼개>는 매우 아름답고 자유롭다. 이러한 흐름에는 작가가 구태여 <얼개>라는 개념과 형태에 구속 되지 않겠다는 자유의지 혹은 변화로 평가된다.

그 어디에도 이제 <얼개>에 관한 한 “고집스런 형태도, 연연함도, 닫힘도 없다. 안과 밖의 구분도, 무게도 없다. 따라서 무엇과도 만날 수 있고,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다는 가장 자유로운 경지에 작가가 정착했음을 상징한다.

어쩌면 그녀는 동양의 철학자 노자가 가졌던 도의 개념을 생각 한 것은 아닐까? 아니 그렇게 생각 했을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이미 “도”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선과 면, 평면과 입체작업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관심은 면 분할을 통하여 색띠를 그리고, 다양한 도형의 형태에 색을 더 하면서 자신의 조형적 어법을 구축했다.

때로는 날카롭게 각진 도형으로, 완만한 선과 부드러운 면을 잘라내며 경쾌한 색면으로 전지연식 스타일을 완성한 것이다.

균형과 고집스런 규칙으로 짜여진 화면 속에 대조적인 형태들은 지적이고 우아한 색채와 교감하며 평면이 보여줄 극적인 조화의 경지를 대담하게 보여준다.

그 형상들은 때로는 “위에서 내려다 본 세상” 같기도 하지만 “옆에서 본 세상”, “내면의 은밀한 이야기”처럼 그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지적인 예술가의 스토리가 농축되어 있다.

작가는 이런 형태의 예술창작과 작업 과정을 “치유와 위안을 주는 행위”로 정의 한바 있다.

독실한 크리스찬이면서 그러한 인상을 주고 있는 이 예술가의 작업 속에는 분명 자가의 메시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궁금하다. 하지만 여전히 필자가 바라보는 전지연 작업에 확신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기도하는 행위”와 동일한 의미와 가치를 가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차원에서 전지연의 작품을 보는 것에 동의 한다면, 이번 쉐마 미술관의 작품들은 그간의 고뇌에 대한 하나의 초월적인 기도의 응답인 동시에 결과로 불러 마땅하다.

그 응답에서 그녀는 그 동안 갈고 다듬어 온 <얼개>에서 진일보한 승화 된 색면과 구성의 엘도라도에 무사히 안착 했음을 알리는 싸인이 되는 셈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녀가 펼쳐 보이는 색면과 구성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주목해 볼 일이다.

이제 문제는 궁극적으로 이 작업들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더욱이 그녀의 메시지가 추상적일 때 그 해석은 더 난해할 수도 불가능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미학자 빌헬름 보링거가 간파했듯이 추상미술은 감정이입의 중요한 전달 형식일 것이다. 이처럼 전지연의 모든 예술은 근본적으로는 어떤 내적 충동과 관계에서 출발하고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그 예술충동과 필연적 관계를 명쾌하게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림을 마치 모든 이유와 결과로만 해석하려는 것 또한 무모한 일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가족과 일상의 관계에서부터 자연, 나아가 절대자, 그리고 나와의 내적 관계”까지 그녀의 회화가 이런 메시지를 아우르고 있음을 고백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들이 작품 속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등장 시키지 않는 것이 전지연 회화의 특질이자 은근한 매력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회화는 내면의 의식을 색과 형태로 담아내는 메타포적 언어의 예술이 아닐까 추측 된다. 예를 들면 그 생활 속의 흔적들이 화면 속에 때로는 차가운 형상으로, 우아한 색채로, 작은 띠로, 비정형의 얼개로 합체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달한 그 비밀스런 색채와 형태들의 조화가 우리들에게 변하지 않는 시각적 즐거움의 풍부하게 준다는데 그의 회화적 메시지는 이지적이고 종교적 숭고함이 묻어난다.

나는 그녀가 얼개를 버리지 않고, 얼개에서 혁신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색채와 형태의 비약적인 표현에 크게 주목한다. 왜냐하면 얼개가 추상적 형태로 단순화 되면서 그녀는 색면의 분할과 구성을 연출하는 능력이 거침없이 배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마치 말레비치처럼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형태에 목말라 했듯이 원, 사각형, 삼각형 등에 색채를 이끌고 기하학적 바다로 끊임없이 항해 할 것이다.

또한 여전히 회화의 근본적인 조형 요소인 선과 색으로 세르쥬 폴리아코프가 이룩한 탁월한 구성의 질서 있는 작품성에 다다를 것이다.

자연의 기본적 형태에 대한 몬드리앙의 지적인 탐색이 예술 세계에 새로운 통로를 제시해 준 것처럼, 그의 <얼개>가 회화가 가지는 최고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또 다른 입체작품의 가능성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하여 추상으로 화면을 더욱 질서 있게 분할하고, 감정을 형태화 함으로서 작가의 사명인 메시지의 본질에 다다를 것이다.

이런 전지연의 시각적 표현의 메타포가 가능한 이유는 작가가 그다지 미술의 트렌드를 따르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온전하게 기하학적인 형태와 색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데 끊임없이 회화의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렇게 캔버스에 자신의 메시지만으로 언제나 화면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외로운 일일 것이다. 그 외로운 순례 길에 그가 잠시 관심을 보였던 입체작업으로의 표현 영역을 확장해 보는 것도 그녀에겐 엘도라도 이상의 오아시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진부한 평면회화의 일탈로 보이지만 극복이며 이것으로 표현의 다양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지연작가는 기본적으로 속성상 자신이 인지한 내면의 풍경을 어느 때는 모호하게 드러내고 다소 불균형적인 구조와 형태로 담아낸다. 그래서 <얼개>의 연작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며 강요하지 않아서 자유롭고 지적인 교양이 있다.

때로는 공간이 주는 시각적 비례에 우리를 호흡하게 하고, 색채의 아우라에 침묵하게 하며, 편안한 형태의 펼침으로 존재의 흔적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너무 우리의 소중한 내면의 풍경을, 관계를 팽개친 채 아름다운 순간들을 상실한 채 현실에 파묻혀 생활한다.

전지연의 회화는 그런 인간 삶의 내밀한 풍경에서 관계의 존재방식을 끊임없이 캐물어가며 치열하게 시각화 하는데 무엇보다 회화로서 치명적인 매력을 품고 있다.

우리가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생명의 즐거움과 지적 성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미술의 아름다움이자 힘이며 생명력이 아닐까?

글 / 김종근 (미술평론가. 고양 국제 플라워 비엔날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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