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쉐마미술관 신진작가 지원전 ‘창조의 정신’
참여작가 : 곽아현, 김연식, 김경옥, 서윤아, 오완석, 장지은, 정윤진, 최희승
전시기간 : 2015년 8월 20일 ~ 9월 13일
전시장소 : 쉐마미술관 대전시실
관람시간 : 9:30 ~ 18:00 (30분 전 마감)













작가노트
감정에 관하여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오묘하다. 각자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들은 당연히 다른 거겠지만 같은 것을 두고도 남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실과 당사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사실이 판이하게 다르기도 하니 말이다. 상황에 따라 느껴지는 경중의 차이이거나, 살아온 환경과 경험들 또한 나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 차이가 존재함에도 생각의 회로나 코드, 감성에 있어서 상당부분이 교차되고 교류와 교감이 충분히 생성된다면 이건 “내가 칠판에 점을 찍었는데 내가 눈을 감고 다시 칠판에 점을 찍어 방금 찍은 점을 맞출 확률이 바로 나와 너희들이 만나게 될 확률과 너희들은 지금, 지구, 그것도 대한민국, 그것도 서울, 그것도 ××고등학교, 그것도 1학년 4반에서 그런 확률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라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배우 이병헌의 대사처럼 엄청난 절묘함으로 마주한 특별한 인연 정도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감정의 정도라는 것이 간혹 어떤 개인사의 원인으로 인해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되어 객관전인 이성을 지배하고 말 때, 우리는 좀 더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나 자신이 우선 살기 위해 어떤 방식의 표현을 선택할 것이며, 적절한 각자의 행복을 위해 본능적인 사회성을 동원하여 누군가와 교류함으로써 운 좋게도 적절히 융화시키고 해소해 낼 수 있는 그런 통로를 발견하는 것에 대해서도 매우 고심하게 된다. ‘Nevertheless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말이다. 당연히 죽지 않으려면 살아내야 한다.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만으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선인들의 말처럼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옥죄는 감정의 불문율을 너는 마음을 비운 채 풍덩 뛰어 들 것이냐, 아니면 괴로움에 몸서리치며 평생을 불평불만 속에서 어둠을 핑계 삼아 스스로를 혹사 시키며 시달리기만 할 것이냐. 인간은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 누군가가 존재함으로써 여러 가지 종류의 감정들이 생겨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혼자가 아님이 확실하고 여러 감정들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들인데, 그것들은 어떻게, 어디로, 누군가에게서 섞여지고, 변화하고, 치유되고, 해결되며, 해소될 것인가. 사랑, 죽음, 행복, 즐거움, 고통, 괴로움 등 이 모든 것들은 상쇄될 수 없는 인간의 굴레 속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곽아현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며, 그 과정에서 감정이 생겨난다. 현대인들은 더욱 많은 페르소나를 가지고 맡은 역할들을 수행하고, 그 사이에서 발생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우리를 극심한 피로 속으로 몰아넣는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스트레스 상황을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수많은 소리와 불빛들로 가득한 현대도시에서 사람이 없는 놀이터라는 장소는 그러한 대화의 시간이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이다. 놀이기구와 작은 풀꽃, 나뭇잎 같은 소재들은 그러한 장소의 한 단편들을 구성한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게 되고, 그 기억과 감정들을 빈 공간에 풀어놓는다. 공간 곳곳에 남겨진 작은 흔적들은 기억과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또는 그 기억과 감정들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작품 속의 빈 공간들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무수한 이야기와 감정들이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고요하고 쓸쓸한 풍경은 감상자들의 내면에 있던 불안, 외로움 등의 감정들을 마주 볼 기회를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감정들을 살피는 것은 진정한 자기 치유의 시작이다.
김연식
우리는 사회 안에서 생을 시작하며 성장해 가고, 사회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자연의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은 우리 인간사회의 개개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받고, 표현하기까지 대부분 자연과 마주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 자연이 주었던 순간의 역동성, 생명현상, 푸른나무와 드넓은 대지는 본인에게 원초적인 생명에너지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것은 생물이 갖는 유기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김경옥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나 늙어 죽을 때까지의 과정. 그 반복적인 굴레의 궁극은 무엇일까. 그 근원에 대한 물음을 위해서는 우선 자신에 대해서, 내면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수많은 개체 중 하나로서의 나를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내가 본 내면의 세계는 깊고 어둡고 고요한 곳이었다. 건조하고 황량하지만 따뜻하고 포근하기도 했다. 빛은 금세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알 수 없는 검은 것들 이 공기를 가득 메웠다. 나는 그곳에서 환영처럼 눈앞에 어른거리다 사라지고 잔상처럼 머릿속을 헤매는 이미지들을 잡아 기록한다. 궁극의 실체에 다가서기 위해 응축하고 간결화 한다. 그것은 마치 이 세계의 탄생에 대한,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과도 같다.
그 심연의 내막에서, 피어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마치 반딧불처럼 유유히 섬광을 내다 사라지는 것. 혹은 실체를 더해가는 잡히지 않는 무엇에 대해, 마치 우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암흑물질과도 같은 내 안에 팽배한 그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검은 가
루와 수많은 중첩된 생각들은 빛으로 환원되었다. 생각과 재료와 시간이 축적되는 과정 안에서 사람과 삶이라는 산재된 것들에 대해 되뇌이고 싶다.
검은 그림이라고해서 의도적인 무게감 이라던지 색에서 오는 기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 그림은 얕은 검정이 수없이 반복되어있다. 빛은 결국 하나가 되면 하얗게 타버리고, 물감은 하나가 되면 푸른 검정이 되어버린다. 넓은 범주에서 존재의 유, 무와도 연관된 표면이, 감정과 생각을 드러나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수많은 사고와 시공간의 응축된 표현인 회화를 통하여 서로에게 감응할 수 있는 과정과 경험을 작품으로 함께하고자 한다.
서윤아
Case
이 작업은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설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 당신은 작가입니까?
– 계획 중인 다음 작업이 있습니까?
– 그렇다면 그 작품에 크기는 어떻게 됩니까?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은 나에게 작품의 치수를 알려주기 위해서 머릿속으로 무엇인가를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치수대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속이 빈 케이스를 제작하고, 만들 수 없는 것은 설문지로 모아 놓는다.
2011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은 생각을 형상으로 드러내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하여 초기에는 주변 미술인을 상대로 질문하였지만, 곧 그 대상이 불특정 다수에게로 확대되었다. 이후 5년여 동안 수집한 약 400여 개의 대답을 통해서 미술작품을 대하는 다양한 해석들을 보았으며 디테일한 작업의 구상보다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적는 등, 작가의 질문을 통해 상상의 즐거움 또는 창작의 어려움을 경험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케이스작업은 치수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동안 이미 각자의 작품이 완성되는 개념적인 프로젝트이다..
오완석
Unseen Picture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는 존재들보다 더 강함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삶에 온기를 주는 것은 숨과 공기, 감정, 사랑과 같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내유외강’이라는 말이 있다. 그 반대는 ‘외유내강-진짜 강함은 약함에 감추어져 있다.’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게 겉으로 강해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또한 외적인 것에 의해 무엇인가를 평가하는 일들이 쉽게 일어난다. 그래서 감추어진 강함을 발견하는 일은 낡은 상자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과 같이 되었다. 그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 주의가 필요 하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견디어 내는, 또한 그 존재에 대한 의심 없이 계속 걸어가기 위한 믿음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곧 삶이다.
삶은 흩어진 조각들을 가지고 퍼즐을 맞춰가는 것처럼 완성된 그림을 보지 못한 채 걸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모아지는 한 조각, 한 조각의 퍼즐들은 저마다 작고 다른 모양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한 조각에서 완성될 그림의 부분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몇 개 의 조각들을 들고 보이지 않는 그림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걸음에는 ‘믿음’과 마음에 존재하는 그림을 보기까지의 기다리는 ‘견딤’이 함께 존재하게 된다.
나의 작업은 그 보이지 않는 그림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이끌어 내길 원한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종이와 나무 조각들과 같은 재료들은 자연적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들이다. 이미 사용되어 버려진 것이기도 하고 쓸모없이 여겨져 방치되어 있었기도 하다. 나는 버려진 조각들에게서 가능성과 의미를 찾는다. 그 일은 곧 생명이 없던 것이 숨을 쉬게 되는 것과 같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 일지라도 모든 것이 어떠한 목적이 있음을 알게 한다.
우리의 삶은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점점 그러한 것들을 보는 눈과 마음을 잃어가고 보이는 것만 쫒아간다. 결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걸어감으로써 얻어지는 진짜 결과물들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얻는 보물이다.
장지은
Seeing the Unseen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작업은 비단 위에 다량의 물과 먹을 사용하기에 어떻게 그려질 지는 먹과 물이 다 마르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작업에 대한 구상은 있지만 디테일이나 최종 결과물은 긴장과 기대감 속에서 기다려야 알 수 있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림이 완성되기도 한다. 마르는 시간 동안 먹이 어떻게 번져나갈지 예상할 수 없기에 붓으로 할 수 있는 만큼만 손을 대고 나머지는 시간의 흐름에 맡긴다. 시간은 내가 붓으로 그리지 않았던 것-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어 한 장의 비단 그림이 완성된다.
완성작은 입체다. 한 장의 비단 그림 위에 또 다른 비단 그림 2장을 겹쳐 표현하기에 모두 3장의 비단은 서로 1~2cm정도의 간격을 두고 틀 위에 팽팽하게 묶인 채로 마무리된다. 비단과 비단 사이의 빈 공간의 공기는 아교처럼 미디엄 역할을 하는데, 이는 비단이 전시 공간의 빛이나 습도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기 때문이다. 습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3장의 비단이 느슨해 질 경우 그림은 처음과는 다르게 변한다. 그림이 그려지는 부분 보다는 그려지지 않은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작업할 때가 많다. 빈 공간은 손을 대지 않은 곳 그 자체일 수도 있고 각각의 비단 그림 사이의 비어있는 간격이기도 하다. 비단 그림 사이의 빈 공간은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물결무늬를 만들어(모아레 Moire 현상) 그림을 달리 보이 보이게 한다. 보이지 않는 공간과 비어 있는 공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상상의 여지를 남겨 둔다.
비단 화면을 중첩시키는 이유는 평면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단에 그리면 불투명하여 그 뒤가 비치는데 화면 뒤에 비치는 또 다른 그림이 있고 그 그림에 또 다른 그림이 비쳐 보인다. 표면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회화 작업일지라도 공간을 한정짓고 싶지 않다.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유토피아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고 그 곳에서 위안을 받고 위로해 주고 싶다.
정윤진
모든 사물, 모든 사람은 관계함의 연속성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잠자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어떠한 기억, 냄새, 주변의 공기, 이불이 스치는 소리, 베개의 촉감 등과 관계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관계하고 있음’을 매 순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공기는 관계가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며 이 사이는 우리를 부양하고 있다. 결국 개인이 혹은 어떤 사물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 않고, 공간이 각각의 사물과 타자에게 사이(관계함)을 다른 형식으로 낳아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는 절묘하게 짜여있어, 어떤 하나의 물성 혹은 시간성이 틀어진다면 그 주변의 공기가 바뀜과 동시에 모든 것의 균형을 잃게 된다.
이 관계는 하나의 대상과 대상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기억과 경험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과거로부터의 기억과 경험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들은 일방적으로 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생각한다. 말인즉 과거의 어떠한 사건 또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은 후에 기억으로 형성되며 시간이 지남과 함께 이 기억에 대한 기억으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된다. 이처럼 망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끊임없이 변형이 반복되며 새로운 형태를 형성하게 되고 동시에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과거의 어떠한 사건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우리는 끊임없이 그 사건들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거짓과도 같은 장면을 지나 우리 스스로 진짜 같은 장면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이 행위가,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균열을 메우는 행위이고, 진실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작업을 통하여 원하는 것은 아마도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삶과 울리는 공동의 무언가를 찾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처럼 나의 작업이 하나의 인덱스로 작용하여 그들의 생각을 도약시키는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내밀한 친밀성을 작업을 통해 요청하고 있다.
최희승
Categories
댓글을 달려면 로그인해야 합니다.